우리는 종종 교육을 지식의 전달로만 이해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볼 수 있으며, 무엇이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가?”
그에게 교육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감각의 재구성이며, 이 감각의 정치가 교육의 본질을 구성합니다. 교육은 ‘감각’을 바꾸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랑시에르의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의 질서) 개념을 중심으로, 교육을 다시 사유해보고자 합니다.
1. 아이스테시스란 무엇인가?
미학이라는 의미의 ‘아이스테시스’는 실상 무엇이 감각될 수 있는가, 누가 그것을 감각할 수 있는가를 결정짓는 사회적 질서입니다.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의 분할, 즉 ‘누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가’를 조직하는 질서
이 질서는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는 일상적 직관, 즉 다음과 같은 관념들로 구성됩니다.
- “학생은 모른다”
- “교사는 알고 있다”
- “아이들의 말은 미성숙하다”
하지만 이 감각 질서 자체가 정치적 선택이라는 것이 랑시에르의 핵심 주장입니다.
자크 랑시에르의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의 정치와 미학의 재구성
서양에서 미학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감각적 짜임새(tissu sensible)와 이해 가능성의 형식을 지시하는 범주의 이름이었습니다. 실상 특별한 경험 형식을 지시하는 개념으로서의 예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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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거 교육의 문제: ‘지적 불평등의 재생산’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전통적 교육의 문제를 강력히 비판합니다. 그는 '설명의 논리'가 학습자의 평등한 지성을 억압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설명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릅니다.
- 교사가 알고 있고, 학생은 모른다.
- 교사는 ‘이해되도록’ 설명해 준다.
- 학생은 교사의 설명을 따라야만 배운다.
이 구조는 학생을 항상 부족하고 미성숙한 존재로 고정시킵니다. 결국 교육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지적 위계질서의 재생산이 되는 것입니다.
3. ‘평등의 전제’로서의 교육: 『무지한 스승(Les Maîtres ignorants)』을 중심으로
랑시에르는 모든 인간은 이미 지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교육이 ‘지식의 격차를 메우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평등한 지성을 ‘행동하게 만드는 조건’이라는 관점으로 이동시킨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이러한 교육은 ‘알려주는 자’가 중심이 아니라, 스스로 감각하고 사고하며 말할 수 있는 주체를 만드는 교육입니다.
이러한 자크 랑시에르의 교육적 접근은 그의 저서 『무지한 스승(Les Maîtres ignorants)』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책은 1987년에 출간된 철학서로, 교육, 지식, 해방에 관한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세기 인물인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의 교육 실험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사례를 통해 기존 교육 체계의 위계와 권위를 비판하고, 누구나 지성적이며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급진적인 평등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1) 조제프 자코토의 경험: 모르는 자가 가르친다
- 자코토는 프랑스 혁명 이후 망명 중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수업을 해야 했습니다.
- 그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함께 실린 텔레마크의 모험이라는 책을 학생들에게 주고, 프랑스어를 직접 가르치지 않고 학생들에게 스스로 독해하고 요약하게 했습니다.
- 놀랍게도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효과적으로 습득했고, 자코토는 "가르치는 것 없이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2) '지성의 평등'이라는 급진적 주장
- 자코토는 모든 인간의 지성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습니다.
- 그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 즉 지성을 사용할 의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 기존의 교육 체계는 이 평등을 은폐하거나 억압한다고 비판합니다.
3) 무지한 스승 vs 앎을 전수하는 스승
-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을 강조합니다.
이는 학생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닌, 학생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해방시키는 사람입니다. - 반대로 전통적인 교사는 '설명'을 통해 학생의 지성을 억압하고, 항상 학생을 ‘배우지 못한 자’로 남겨 둡니다.
4) 설명의 논리 = 지적 예속
- 설명은 지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위계를 전제합니다.
즉, ‘나는 알고, 너는 모르므로 내가 너를 가르쳐야 한다’는 권력 관계입니다. - 이런 교육은 학생이 항상 ‘불충분한 존재’로 느끼게 만들며, 진정한 학습을 방해합니다.
5) 배움은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
- 학습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에게 “주의하라, 비교하라, 추론하라”고 말하는 자기 명령의 과정입니다.
- 즉, 지성은 타인의 설명 없이도 스스로를 조직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믿음이 핵심입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배울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자의 지식보다 배우는 자의 의지와 지성의 평등에 기반해야 합니다. 교사의 역할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믿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스승’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배움의 주체를 학생에게 돌리는 진정한 해방자입니다. 다만 현시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배우는 자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교사의 역할이 학생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믿고 격려하는 것이라면, 애초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학생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일까요? 교사는 학생 스스로의 배움을 믿고 격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누구에게나 어떤 분야에서는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어떤 것도 배우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막강하다면 어떨까요? 만일 발달된 과학기술이 삶의 모든 것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의지만 있다면요? 그것도 의지라고 단순히 해석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일까요?
4. 감각의 정치로서의 교육
다만 랑시에르의 아이스테시스 개념은 교육을 철저히 정치적인 행위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전통 교육 | 아이스테시스적 교육 |
지식의 전달 | 감각의 재구성 |
위계적 (교사 ↔ 학생) | 평등한 지성 간의 만남 |
이해 중심 | 감각·사유·표현 중심 |
규범화된 언어 | 새로운 말하기의 가능성 |
이러한 교육은 학생들에게 ‘정답’을 가르치기보다는, 자신만의 언어로 말할 권리와 능력을 부여합니다. 즉, 말할 수 없던 자의 출현, 이것이 교육의 정치적 순간입니다.
5. 예술교육과 아이스테시스
랑시에르의 미학 개념은 예술교육에 특히 깊은 함의를 가집니다. 전통적인 예술교육은 흔히 특정한 기법을 익히고, 정해진 미적 기준을 따르며 평가받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진정한 예술교육은 감각의 경계를 흔드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예술인가’, ‘누가 예술가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열어젖히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그의 입장은 아이도 노동자도 비전문가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술교육뿐 아니라, 모든 감각적 표현 교육(드라마, 무용, 음악, 글쓰기 등)에 적용될 수 있는 사고틀입니다. 그리고 ‘무지한 스승’의 윤리를 떠올리면, 랑시에르는 교사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정한 교육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무지한 스승의 세 가지 원칙
- 지적 평등의 전제
- 설명의 거부
- 의지의 자극
교사는 설명하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해석을 유도하며, 감각을 열어주는 자입니다. 이는 모든 예술교육자, 철학 교사, 창작 지도자에게 중요한 교육 철학이 될 수 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에게 교육은 지식의 문제 이전에, 감각의 문제입니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보일 수 있는가. 이 감각의 분할을 뒤흔드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교육의 장에 들어서게 됩니다. 교육은 더 이상 ‘가르침’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던 자가 말할 수 있게 되는 사건’으로 ‘보이지 않던 세계가 감각될 수 있는 장’이어야 합니다. 교육은 감각의 민주주의입니다. 랑시에르의 아이스테시스는 우리에게 교육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감각의 문을 열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해 드는 의문은 '모두가 말할 수 있는가'입니다. 교사를 제외하고 교육 현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보통 표현이 쉽고 빠른 학생들입니다. 그들은 필요 없는 표현도 서슴지 않으며 말로써 시간과 공간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다수의 표현이 미숙하거나 표현 자체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필요없는 그 말들을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합니다. 이것이 감각의 민주주의일까요? 모두가 평등하게 말하는 이상은 개인의 타고난 성향이나 자질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말하기 싦은 사람들을 말하게 하고,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들은 늘 부족하다고 보채는 상황이 진정한 교육의 장인지 곱씹게 됩니다.
표현주의 미술교육
예술을 철학으로 논한 이탈리아 사상가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의 미학: 표현으로서의 예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답변 중,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의 미학 이론은 예술을 ‘표현’이라는 철학적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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