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미학의 선구자 발터 벤야민, 그의 미학은 사진, 신문, 라디오, 영화 등 다양한 매체들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며, 지극히 유물론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의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그가 보는 "예술작품은 어떤 측면에서도 영역적으로 국한시킬 수 없는, 한 시대의 종교, 형이상학, 정치, 경제적 활동들의 총체적 표현"으로 파악했습니다. 20세기 초반, 세계는 전쟁과 혁명, 자본주의의 확장, 기술의 발전 속에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맞이했습니다. 이 격동의 시대에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예술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예술이 단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인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벤야민의 예술관을 중심으로, 특히 그의 대표적인 에세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중심축으로 삼아 ‘아우라’, ‘기술복제’, ‘정치적 예술’, '대중’이라는 주요 개념들을 살펴보며 그의 예술철학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1. 아우라(Aura)란 무엇인가?
1) 아우라의 정의
벤야민은 예술작품이 원래 가지고 있던 고유한 존재감, 시간과 공간의 유일성, 숭고함을 '아우라(Aura)'라고 불렀습니다. 아우라는 말하자면 예술작품의 원본성이 주는 고결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원본을 실제 루브르 박물관에서 보는 것은 책이나 인터넷에서 보는 복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줍니다. 그 현장성, 시간의 무게, 독특한 존재감, 이것이 바로 ‘아우라’입니다. 예술작품의 유일성은 그 작품이 전통의 연관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 전통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서 지극히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 현상으로 정의된다.
2) 아우라의 특징
- 유일무이함: 오직 하나뿐인 원본.
- 현존성: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
- 거룩함과 거리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듯한 신비로움.
- 아우라의 문제점: 벤야민은 아우라가 예술을 ‘우상화’하고 권력과 결탁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고대 성당의 성화(icon), 중세의 종교미술, 귀족의 초상화처럼 아우라는 종종 지배계층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도구로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2. 기술복제가 예술을 바꾸다
1) 기술복제란?
벤야민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진과 영화라는 기술적 복제수단이 등장하게 되자, 예술이 본질적으로 변했다고 보았습니다. 사진 한 장은 수백, 수천 번 인쇄될 수 있고, 영화는 수많은 관객에게 동시에 상영됩니다. 이것은 단지 복제의 편의성에 그치지 않고, 예술의 ‘정체성’ 자체를 바꿔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이 예술이냐는 물음에 많은 통찰력을 쓸데없이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는다.
2) 아우라의 붕괴
인간이 기계장치를 통해 재현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기소외가 지극히 생산적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복제 가능한 예술이 등장하면서, 예술은 점점 ‘아우라’를 잃게 됩니다. 작품이 더 이상 유일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죠. 모나리자 복제 그림이 벽에 걸려 있어도, 우리는 루브르에서 느낀 아우라를 느끼지 못합니다. 영화는 본래부터 복제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지며, 연기자는 관객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합니다. → 결과적으로, 예술은 ‘신성함’에서 벗어나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것으로 변화합니다.
영화 제작소에서 기계장치는 현실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기계장치라는 이물질이 제거된 순수한 현실의 모습은 어떤 특수한 처리 과정의 결과, 즉 특별히 설치한 카메라장치를 통해 촬영한 결과, 그리고 그렇게 촬영된 것을 그와 동일한 종류의 다른 촬영 장면과 함께 조립한 결과로써 생겨난다. 기계장치에서 벗어난 현실의 모습은 여기서 그 현실의 가장 인위적 모습이 되었고, 직접적 현실의 광경은 기술 나라의 푸른 꽃이 되었다.
이처럼 현실의 영화적 재현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비할 데 없이 의미심장한 재현이 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영화적 재현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예술작품에 요구할 권리가 있는, 기계장치의 개입이 없는 현실의 모습을 바로 그 기계장치와의 집중적인 상호침투를 토대로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가장 낙후된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가장 진보적 태도로 바뀐 것이다.
3.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다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1) 예술의 정치화 vs 정치의 미학화
벤야민은 파시즘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합니다.
- 정치의 미학화: 파시즘이 사용한 전략. 정치적 이념을 장엄하고 감성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을 선동.
(예: 히틀러의 연설, 대규모 나치 퍼레이드)
- 예술의 정치화: 벤야민이 주장한 방향, 예술을 통해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대중의 각성을 유도.
(예: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 그는 “파시즘은 예술화된 정치, 우리는 정치화된 예술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 영화와 사진의 가능성
사진과 영화는 아우라를 파괴함으로써 예술을 대중의 삶 가까이로 끌어오고, 나아가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사진: 객관적 기록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낼 수 있다.
- 영화: 다양한 시점과 편집을 통해 현실을 해체하고 다시 구성할 수 있다. → 이는 곧, 예술이 단지 미적인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대체로 서로 분리되어 있던 사진의 예술적 가치와 학문적 가치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화가 지닌 혁명적 기능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 대중과 예술: 감상자에서 생산자로
- 대중의 변화: 기술복제를 통해 예술은 더 이상 전문가나 귀족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대중 모두가 접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되었습니다. 벤야민은 이 점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 과거: 예술은 극소수만 감상하고 소유.
- 지금: 누구나 예술을 감상하고, 심지어 창작할 수 있음.
- 수동적 감상에서 능동적 참여로: 기존의 예술 감상자는 수동적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대중은 능동적으로 예술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SNS에 사진을 올리는 것도 하나의 ‘표현’입니다. 유튜버, 브이로거, 인플루언서는 기존 예술가처럼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 벤야민은 이런 가능성을 예견하며 “예술의 민주화” 가능성을 말합니다.
5. 예술, 해방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벤야민은 진정한 예술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예술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낯설게’ 만들어 사람들이 익숙한 일상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통해 감각을 깨우고 이념을 의심하게 만들고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술은 단지 미적 체험을 넘어, 비판적 사고와 사회적 성찰을 유도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해방의 도구로써 충분히 작동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벤야민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복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천 개의 밈, 유튜브 영상, SNS 콘텐츠들이 매일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술복제는 이제 스마트폰 하나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었고, 예술은 유례없는 대중화, 민주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미디어의 정보에 무비판적으로 빠지며, 거대 권력이 미디어를 조작하는 현실을 목도합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벤야민의 예술관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진정한 예술은 감각을 열고, 현실을 새롭게 보게 하며, 대중을 깨어 있게 한다.” 즉, 예술은 단지 ‘예쁘거나 멋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