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통일성은 다양한 합리성들 사이에서 그저 형식적인 동일성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전에는 이성을 다양한 합리성들의 상위 개념이자 기본 형식으로 간주하는 구상을 충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합리성의 유형들이 다양화되고 특수화된 현실에 직면하여 이성의 개념은 달라졌다. 이성은 더 이상 우주적인 기능이 아니라 지상의 기능으로, 전체를 총괄하는 기능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들을 연결하는 기능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성을 오성(합리성)과 구분: 특정 영역에 한정된 형식들과 달리 이성은 포괄적인 능력
1) 이성은 오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져야 하며 또다시 일종의 오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이성은 어떤 전체성을 소유하려 하고 그 상태에서 다른 것에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과제를 수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성은 합리성의 다양한 형식 자체를 존중해야 하고 전체성을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되며 상호 교류라는 측면에 역점을 두고서 자신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상호 교류에 대한 지각은 전체를 조망하는 것과는 다르다.
가로지르기 이성: 이성은 총체성의 문제와 연관된 능력이기는 하지만, 이성의 이러한 기능은 오직 결합과 상호 교류라는 형태로만 발휘된다.
가로지르기 이성의 구상은 전체성을 파악하려 하거나 구조화하려는 모든 원칙주의적, 위계적, 형식적 구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한 구상들은 이성과 오성의 차이를 무화(無化)한다. 가로지르기 이성은 제한적인 동시에 개방적인 이성이다.
수평적 수행 방식 vs. 총체적인 종합
가로지르기 이성은 합리성의 다양한 형식들을 넘어서지만 그러한 형식과의 관계를 결코 상실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가로지르기 이성이 실현하는 종합은 부분적이고 그 과정은 다층적이다. 가로지르기 이성은 다원성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성이 이성의 형식으로 통용될 수 있게 다원성이 수반하는 아포리아를 제거한다.
가로지르기 이성의 개념은 새로운 종류의 특수한 이성을 지시하는 개념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특정한 이해 방식을 성격 짓는 개념이며, 이때 무엇보다도 적합성과 현재성이 중요한 측면으로 부각된다. 가로지르기 이성은 포스트모던적 모던에 적합한 이성의 형식이다. 전통적인 철학적 고찰이 형식적인 공통성의 문제에만 천착했던 반면, 가로지르기 이성의 구상은 실질적인 상호 교류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실질적인 상호 교류: 함축적 형식과 명시적 형식
각각의 합리성이 자율적인 것으로 설정되면 의미와 한계는 더 이상 외적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내적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다양한 패러다임들은 당연히 대상 영역과 관할 범위를 각자 나름대로 다르게 확정한다. 자율성의 토대 위에서 등장한 다양한 패러다임들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영역을 엄격하게 분할하는 것은 어떤 영역을 정의하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율성이란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영역과 합리성 유형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충분하지 않다. 다양한 합리성과 영역들에 대한 다양한 정의는 단자의 형태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공존과 양립의 문제가 발생한다. 다양한 유형의 합리성들은 각자 자신의 범위를 정하면서 전반적인 토대도 다르게 규정하며 영역들도 각자 자신의 다른 방식으로 배분한다. 따라서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연관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연관성의 문제
어떤 영역에 대한 정의는 다른 영역들에 대한 정의 중에서 합치되는 것과 연결될 때에만 유효하게 된다. 이는 개개의 패러다임이 생겨나는 과정을 주목할 때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개개의 모든 패러다임은 언제나 어떤 다른 패러다임에 반발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예컨대 예술과 삶의 미학적 구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탐미주의적 프로그램에 대한 반대 구상이다. 반대로 탐미주의적 프로그램은 도덕적이거나 개념적인 선입견에 바탕을 두고 예술을 규정하는 입장에 대한 반대 구상으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 패러다임들은 근본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입장이다. 나아가 개개의 모든 구상은 어떤 역사적, 문화적 토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 토대는 다른 구상들의 토대도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도 여러 가지 구상 사이에서 내용적인 연관이 생겨난다. 즉 그러한 구상들은 공통의 토대에 근거하기 때문에 공통적인 면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개개의 모든 합리성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상황에 의존하고 여러 조건에 제약되어 있으며 역사 및 문화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체계가 낳은 그릇된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양한 유형의 합리성들에서 고도의 전문성만을 볼 경우에는 어떤 구상의 틀을 형성하는 조건이나 다양한 연관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개개의 합리성은 많든 적든 그러한 상황이나 조건, 상태 등과 연관되어 기능하며, 그것들이 부정될 경우 합리성 자체의 구성과 적합성 등에서 곧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영역 내의 다양한 정의가 초래하는 영역 간의 관계 형성과 그 밖의 결과, 영역 내부와 영역 상호 간에 모두 확인되는 발생적 연관성, 역사적으로 각인된 공통성은 우리로 하여금 개개의 모든 합리성 유형과 각각의 다양한 패러다임이 맺고 있는 연관과 상호 관계, 배치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성은 상호 교류를 실행하는 능력
이성이 특수한 기능을 발휘하는 영역은 연관과 착종, 상호 교류가 발생하는 제대로 이성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상호 교류를 실행하는 능력이다. 이성은 세 가지 층위에서 작용하는데, 첫째, 이성은 합리성 형식들의 구성과 상호 교류의 가능성을 반성, 둘째, 상호 교류를 실천, 셋째, 다양한 요구들 사이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매체로 기능한다. 이성은 제한된 합리성보다 우월한 능력으로 합리성 형식의 구조와 관계를 반성하는 것, 즉 통일성과 상이성, 상호 연관과 상호 교류, 함축, 유사성 등을 반성하는 것은 이성만이 할 수 있다. 이성은 고차원의 이성이 아니며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완성된 척도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이성은 반성적 해명 작업을 통해 기존 합리성들의 구조와 내적 요구들을 검토할 뿐이다. 이성은 메타 합리적인 능력임은 분명하지만 본질적으로 합리성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능력이다. 이성적 실천이란 어떤 한 가지 유형의 합리성이 지닌 교유한 특성에만 매몰되지 않고 주변 측면들도 함께 고려함으로써 합리성의 효력을 규제하는 실천이다. 이러한 실천은 가로지르기 이성의 수행 형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성적이라 부르는 모든 실천에서는 언제나 개별적인 합리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그 합리성과 다른 합리성들 사이의 연결점, 상호 함축, 교류 등이 함께 고려된다. 이러한 실천이 모두 가로지르기 이성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