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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예술 작품, 지층이 쌓이듯 반복을 통해 깊이를 더하다

by 문화과학자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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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보면 자주 마주치는 한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작가가 여러 작품을 하나의 주제나 형식 안에서 변주하며 만들어내는 ‘시리즈 작업’입니다. 때로는 같은 구도를 반복하는 듯 보이고, 때로는 비슷한 색감이나 형태가 이어지지요. 비슷한 분위기의 유사한 방식의 작품들, 통일 속의 변화가 어딘지 조화를 이루며 어떤 강한 개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왜 예술가들은 시리즈로 작업할까요? 단일한 하나의 작품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예술에서 ‘시리즈’가 가지는 의미와 힘, 그리고 우리가 이를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시리즈 작업이란?

‘시리즈(series)’란 말 그대로 연속성 있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여러 개의 작품을 묶어 놓는 것과는 다릅니다. 시리즈는 작가의 사고 흐름, 주제에 대한 탐구 과정, 형식 실험의 축적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하나의 시리즈 안에서 작품들은 서로 응답하고, 반박하며, 보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인상주의 화가 모네는 자신의 정원에 있는 연못을 수십 점의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수련> 시리즈는 단일 풍경이 아니라 하루 중 빛의 변화, 계절의 차이, 관조의 감정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표현한 시리즈였지요.

 

2. 시리즈의 기능: 왜 반복하는가?

 

1) 탐구의 도구

작가에게 시리즈는 실험이자 탐색입니다.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다루는 동안, 작가는 새로운 시각이나 기법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과학자가 실험을 반복하며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2) 시간과 경험의 기록

시리즈는 특정 순간을 포착하는 대신,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데 유용합니다. 예를 들어, 다이어리처럼 하루하루의 감정과 색을 그린 작품들이 있을 수 있죠.

 

3) 형식적 통일감, 내용적 다양성

형식은 같되 내용은 변화하는 방식으로, 작가는 오히려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색을 다르게, 구성요소를 조금씩 바꾸면서 주제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3. 대표적인 시리즈 작가들

회화, 사진,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에서 시리즈 작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회화 및 판화 시리즈

  •  클로드 모네 – <수련 (Water Lilies)> 시리즈 약 250점에 이르는 대작 시리즈. 프랑스 지베르니의 정원을 주제로, 빛과 계절, 감정을 담은 연작. 인상주의 회화의 정점.
  • 앤디 워홀 – <캠벨 수프 캔>, <마릴린 먼로> 시리즈 팝아트의 아이콘. 소비와 대중문화, 유명인의 이미지 재생산을 통한 비판. 색과 반복을 통해 시각적 충격 제공.
  • 마크 로스코 – 연작 등 대형 단색 추상화 시리즈로 감정과 초월을 전달. 종교적, 명상적 공간 속 시리즈로 깊은 몰입 유도.
  • 게르하르트 리히터 – 사진과 회화를 넘나들며 시리즈의 형식으로 이미지의 진실을 질문.
  • 바넷 뉴먼 – <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시리즈처럼 색을 통해 존재와 감정의 울림을 표현.

2) 사진 시리즈

  •  버하이 하우스(Bernd and Hilla Becher) – 산업 구조물 시리즈 워터 타워, 곡물 사일로 등 기능성 건축물 반복 촬영. 사진으로 유형학(Typology) 구성. 반복과 규칙성 속에서 미묘한 차이 발견.
  • 신디 셔먼 – 가상의 영화 속 장면처럼 자신을 촬영한 사진 시리즈.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시선에 대한 비판.

3) 설치 및 개념미술 시리즈

  • 솔 르윗 – 시리즈 직접 그리지 않고 ‘지시문’으로 제작되는 드로잉. 수백 개에 이르는 설치 작업이 있지만 동일한 규칙 구조 안에서 진행됨.
  • 아이 웨이웨이 – (해바라기 씨) 1억 개의 도자기 해바라기 씨를 사람 손으로 만든 대규모 설치. 시리즈를 통한 반복과 노동, 집단성의 은유.

4) 한국 작가의 시리즈 작품

  • 이우환 – <바람> 시리즈, <점으로부터> 시리즈 반복적인 붓질을 통해 자연과 존재의 상호작용 탐색. 여백과 반복에서 오는 사유적 힘.
  • 김환기 – <우주> 시리즈 점묘 기법으로 구성된 추상화. 밤하늘, 우주의 깊이와 고요함을 담은 감성적 시리즈.

 

이 외에도 수많은 작가들이 시리즈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특히 동시대 예술에서는 전시 형식 자체가 시리즈 작업을 염두에 둔 경우가 많습니다. 

 

4. 감상하는 법: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본다는 것

시리즈 작품을 감상할 때는 한 점만으로 의미를 규정하기보다는 전체 맥락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안의 작은 차이들—예컨대 색조의 변화, 붓터치의 방향, 크기의 차이—는 작가의 미묘한 감정과 사유의 변화일 수 있습니다.

 

시리즈는 마치 시를 읽는 것과 비슷합니다. 반복되는 구절 속에 작가는 강조하고 싶은 감정이나 메시지를 넣고, 감상자는 그 미묘한 울림을 포착합니다.

5. 교육적 가치와 창작의 실마리

 

시리즈 작업은 미술 교육에서도 아주 유용합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주제로 다양한 표현을 해보는 경험은 창의성과 문제해결능력을 동시에 자극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하듯 작가의 작품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나이를 먹습니다. 우리 사유가 늘 변화하듯 작품도 무한 변주를 할 수밖에 없지만 원운동의 중심처럼 항상 되돌아가는 근본은 작가의 사유 속이겠지요. 현재 예술교육에서는 “하나만 그리고 끝내는” 식의 일회성 접근을 넘어서 예술을 과정 중심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더욱이 블로그나 SNS 등에서 실제로 자신의 작품을 공유하는 아마추어 작가나 디자이너에게도 시리즈 작업은 훌륭한 브랜딩 방식이 됩니다. 반복은 기억을 만들고, 연속성은 신뢰를 만듭니다.

 

 

작품을 시리즈로 만든다는 건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깊이 파고들겠다는 태도이며, 변화를 관찰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래서 시리즈 작업이 예술에 주는 의미는 단일 이미지보다 더 풍부한 맥락, 시간성,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여러 장면과 챕터가 쌓여서 더 깊은 세계를 형성하죠. 그리고 그런 자세는 비단 예술가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도 응용될 수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지금 어떤 주제에 몰두하고 있다면—그것을 시리즈로 표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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