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예술로서 만화

by 문화과학자 2024. 2. 21.
반응형

만화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자기표현과 의사소통 형식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만화에도 다른 모든 예술형식과 같은 성질들이 있습니다. 예술이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두 가지 기본 본능인 생존본능과 생식본능에서 나오지 않는 모든 인간활동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그저 밥 먹고 섹스하는 것으로만 보내지는 못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행복입니다. 예술은 진화를 위한 기본 본능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연이 부여해준 역할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1. 순수예술로서 만화

순수예술은 본질적으로 목적, 즉 자신이 예술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회화나 문학, 연극, 영화, 조각, 그 밖의 모든 예술형식에서처럼 만화에도 적용됩니다. 그런데 어떤 매체에서 어떤 작품을 창작하든지 간에, 언제나 일정한 경로를 따릅니다. 만화 역시 그렇습니다.

2. 작품 창작 6단계

  • 첫째, 발상·목적: 충동, 사상, 감정, 철학, 작품의 목적 등 작품의 내용입니다. 
  • 둘째, 형식: 작품이 취하는 양식입니다. 책, 그림, 의자, 노래, 조각품, 만화책 등을 말합니다.
  • 셋째, 작풍: 예술의 유파, 스타일의 어휘와 표현방식, 소재, 작품이 속하는 장르, 작품 하나가 한 장르가 될 수도 있습니다.
  • 넷째, 구조: 모든 것을 합쳐내는 작업입니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 어떻게 배열하고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등과 관련됩니다.
  • 다섯째, 기술: 작품을 만들기입니다. 기술과 실제적인 지식, 창안, 문제해결 방법 따위를 동원하여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 여섯째, 겉모습: 상품 가치, 마무리 등 작품을 접할 때 가장 먼저 드러나 보이는 작품의 겉모양입니다.

모든 예술작품에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평가하는 것은 그 겉모습입니다. 껍질이 매끄럽게 빛나는 사과를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풍이나 발상을 처음 만들어냈으나 표면적인 측면에 신경을 덜 썼던 오래된 예술가들의 작품보다, 종종 최신 인기작들이 첫눈에는 더 나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3. 만화가의 성장과 더불어 예술로서 만화의 창작

만화에서, 그 순환은 전세계의 어린 독자들이 만화를 처음 발견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일부 경우는 만화에 차츰 애정을 느끼고 평생 간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초창기 단계에서, 독자들은 만화의 캐릭터, 발상들, 사건, 감정 등을 직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작가와 독자의 중개자 역할을 만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독자들은 형식에 대해서 의식하기 시작하고, 만화라는 것은 사실 종이 위의 잉크일 뿐이고, 특정한 능력을 갖추면 만들 수 있고, 또한 그런 재주는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 부류에 속하면서 훌륭한 발상들을 가득 품은 어떤 사람이 논리적으로 올바른 시작에 착수합니다. 그에게는 어떤 발상이 있고, 표현형식으로 만화를 골랐습니다. 어쩌면 이제는 어떤 유형의 만화가 자기에게 맞을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대개는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미루어놓고 프로작가가 되려고 다른 만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는 만화에 맞는 붓과 펜, 종이를 사서 연습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프로작가가 되기에는 부족함을 깨닫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 그는 해부학과 원근법에 관한 책을 사서 여러 가지 화법들을 공부하며 다시 수개월 동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결정적으로 '이것이다'하는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기량이 모자랐을 수도 있고, 흥미를 잃었을 수도 있고, 생계유지 때문에 가로막혔을 수도 있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만화 창작의 꿈을 뒤로한 채 떠납니다.

 

  1. 그러나 세계 각지에는 비슷한 경험을 하고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합니다. 그 사람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내내 기량을 닦습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 좋은 학생입니다. 하지만 노련한 프로작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가져가니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시점에서도 그 사람은 기량은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작가의 보조로만 가능합니다. 기량 밑에 숨어있는 만화의 구조를 이해할 때까지는 이 정도가 그 사람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정도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꼭 집중 조명을 받지 않더라도 예술과 산업, 만화 공동체의 한 식구가 되는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다른 또 한 명의 만화가는 같은 과정을 거쳤지만, 그 이상을 원합니다. 그는 깨어있는 시간 모두를 만화 작법과 이야기 서술에 관한 까다로운 문제와 씨름하며 보냅니다. 책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입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가 사실은 그냥 당연시하고 넘어갔던, 더 오래됐고 덜 세련된 다른 만화가를 약간 다듬어낸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그림 도안과 글쓰기 기술 근저에 있는 것들을 볼 줄 알게 됩니다. 이제 완급, 드라마성, 해학과 긴장감, 구성, 주제 발전, 역설 등 만화 전체를 읽어내는 능력을 얻은 그 사람은 이것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자기 책을 세상에 내놓은 그는 곧 대단한 기량을 지닌 만화가로 인정받습니다. 그는 다른 작가들보다 이야기 서술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습니다.
  3. 하지만 그의 작품은 특별난 독창성은 없으므로 비평가들은 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과 가족들이 풍족한 생활을 꾸려나가기에 충분한 수입을 올리는 정도면 만족합니다.
  4. 한편 또 다른 만화가가 비슷한 어려움을 이기고 같은 정도로 성공했지만,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같은 방법으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있는데 자신의 성공이 정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습니다. 찾아내지 못한 퍼즐 조각 같은 것입니다. 그는 똑같은 옛 것을 보여줄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혁신적인 새 기술을 개발하고는, 똑같은 옛 것을 버립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만화 작풍을 터득한 뒤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작품을 이 작풍에 맞춰 바꿔갑니다. 젊은 만화가들이 그의 작풍을 흉내내기 시작하지만, 대부분은 겉모습만 이해할 뿐입니다. 어쩌면 그는 그런 성공에 만족하면서 이제 자신이 모르는 그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길 위에 서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것입니다.
  5. 하지만 다른 곳에서, 같은 수준에 있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또 다른 만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다고 느낍니다. 예술가로서 그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한,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어떤 것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 한, 자신에게 다음의 너무나도 단순한 물음을 던지게 되는 건 단지 시간문제입니다

발상을 목표로 선택하면 그의 예술은 도구가 됩니다. 이때 예술의 힘은 그 속에 담긴 발상의 힘에 좌우됩니다. 여기서는 이야기 서술이 발명보다 우선시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어느 정도는 형식의 발명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이야기꾼, 즉 만화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작가들의 길로서, 그들은 매체를 잘 활용해서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모든 능력을 쏟았습니다. 어떠한 예술작품도 완전히 내용이나 형식 없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다소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만화 조립 공정, 즉 스토리작가, 선화 담당, 펜선 담당, 컬러링 작업 담당 등으로 전문분야가 나누어진 경우에서 각자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 할 때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이 창작, 글, 그림을 도맡아서 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안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내용과 형식, 두 가지 초점 중에 한쪽에 더 많이 몰입했던 작가일수록 방향전환을 할 때 더욱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70년대와 80년대 초에 발표된 아트 스피글먼의 과감한 실험성 높은 작품들은 보면서, 그의 기념비적인 자서전인 《쥐, Maus》에서 보여준 차분한 보고서 양식을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끝까지 벗겨 들어가 보면, 대부분의 예술가들의 궁극적 목표도 여느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높은 이상을 간직한 사람들에게조차 기초본능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예술이 직업이 되거나 사회적 지위를 좌우하는 문제가 될 때는, 예술가가 자신의 목표를 혼동할 위험이 더 커집니다. 하지만 삶의 그런 번잡함을 참작하더라도, 만화가들이 만화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지 생각하면 무척 놀랍습니다. 물론 모두가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만화가들 중에는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도 별 어려움 없이 목표를 이루어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4. 만화와 예술

어떤 예술가가 어떤 매체에서 어떤 작품을 만들더라도 의식하든 못하든 위의 여섯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모든 작품에는 아무리 모호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형식을 취하고 어떤 작풍에 속하며, 일정한 구조를 지닙니다. 모든 경우 어떤 기술을 필요로 하며, 겉모습을 지닙니다. 그리고 만화의 모든 측면이, 자기 표현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경제적 생존일 때조차도 말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자기 예술의 모든 측면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법을 터득하고 자신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잘 이해할수록 예술적인 관심이 우위를 차지하기 쉽습니다. 여섯 단계의 순서는 타고난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측면이 만화가의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르는가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의 수련과정은 끝에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더디고 꾸준한 여행입니다. 즉 껍질에서 핵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술의 핵심에서 마침내 가장 중요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형식이 작품을 지배할 때, 그것은 마치 씨 없는 과일처럼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은 예술의 모양을 당연시하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여 미지의 경험으로 가득한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습니다. 반면에 발상이 작품을 지배하며 그 모양을 결정할 때는, 만화는 그 발상들을 보다 멀리, 그리고 넓게 심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다시 순환은 시작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