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뭔가 해보자고, 지루한 어른들 세상에 한 방 먹이는 거!"
서재에서 꺼낸 책 한 권은 노란색이 바랜 표지만큼 세월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69'라는 숫자가 큼직하게 쓰여 있는 무라카미 류의 자전소설 『69(식스티나인)』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오래전 읽었을 때는 그냥 가볍고 통쾌한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쩌면 저 또한 ‘지루한 어른들’ 중 한 명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1. 『69』는 무라카미 류의 '고등학교 반란기'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소설 『69 sixty nine』(1979년 발표)는 무라카미 류 자신의 고교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반(半)자전적 소설로, 1969년 일본 규슈 지방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17세 청년들의 반항과 자유를 그립니다. 1969년, 규슈 사가현의 한 시골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3 남학생 ‘겐’이 주인공인데, 그가 친구들과 함께 벌이는 일련의 장난 같고도 진지한 저항과 해프닝이 이야기의 중심이에요. 시위, 영화제 개최, 로큰롤 밴드, 여학생 기숙사 침입까지… 온갖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대면서도, 그 중심엔 어쩐지 진심이 느껴집니다.
켄의 대사는 늘 유쾌하면서도 도발적입니다. “우리가 지금 안 움직이면, 평생 저들한테 휘둘리며 살아야 돼.” 그런 문장을 볼 때면,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라 정말 무언가 바꾸고 싶은 혁명가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곧바로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문학적 척을 부리는 모습이 나오면, 피식 웃게 됩니다.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이죠. 진지함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2. 소설 속 등장인물
1) 야스다 켄 (야스다 류타로)
주인공이며 고3 남학생, 반항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서구 문화(록 음악, 영화, 문학 등)에 심취해 있는 캐릭터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학교와 사회에 대한 저항적인 퍼포먼스를 기획합니다. 작가 무라카미 류의 분신 같은 인물입니다.
2) 아다마 (아다마츠)
야스다의 절친으로 야스다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도 예술과 자유에 열정을 품습니다. 둘이 주도해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킵니다.
3) 마키
야스다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학생입니다. 지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야스다의 예술적·연애적 열망을 자극합니다. 야스다에게 중요한 존재이자 작품 속에서 상징적인 ‘뮤즈’ 역할을 합니다.
4) 미즈나카
친구 그룹의 일원으로 학교 문화제 준비와 반항 활동에 함께 참여합니다.
5) 모리타
친구 그룹의 또 다른 멤버이며, 소극적이지만 야스다와 아다마의 활동에 동참합니다.
6) 여러 여학생들
대부분 야스다와 친구들이 일으키는 사건을 지켜보거나, 거기에 참여하거나, 혹은 비판하는 인물들입니다. 이외에도 선생님, 학교 관리자, 주변 어른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주로 기성세대의 상징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3. 소설의 주요 내용
1) 배경
시간적 배경은 1969년, 일본 전역은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규슈 지방의 어느 시골 도시 고등학교가 공간적 배경입니다. 일본도 전국적으로 학생운동과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규슈의 이 작은 시골 마을은 여전히 보수적 분위기입니다.
2) 시작
야스다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의 권위적인 분위기를 답답해합니다. 그는 서구 록 음악, 영화, 문학 등을 통해 ‘자유’를 동경합니다. 야스다는 학교, 기성세대, 사회 전반의 권위에 반항심을 품고 있습니다.
3) 반항과 계획
야스다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점거하거나, 교사들에게 반항하는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학교 축제를 독자적으로 기획하며 사회와 어른들에게 도발적인 메시지를 담은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락 밴드 공연, 실험적인 영화 상영, 퍼포먼스 등 ‘혁명적인 축제’를 만들어가려 합니다. 그 목표는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어른들이 지키고 있는 체제와 권위를 뒤흔드는 것이며, 축제를 통해 학생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4) 마키와의 관계
야스다는 같은 학교 여학생 마키에게 끌리고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려 하지만, 순탄치 않습니다. 야스다는 마키를 단순 연애 감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예술적·정신적 동반자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마키는 야스다의 마음을 완전히 받아주진 않으며, 적당히 거리를 유지합니다. 즉 마키는 야스다에게 지적 호기심과 예술적 동기를 자극하면서도 완전히 마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소설 속에는 연애 감정과 사춘기 특유의 갈망이 자유와 저항의 느낌과 함께 섞여 있습니다.
5) 친구들과의 충돌과 갈등
축제 준비는 점점 커지고, 참여한 친구들 사이에도 긴장과 피로가 쌓입니다. 일부 친구들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 실망하고 점점 동력을 잃어갑니다. 야스다는 끝까지 이상을 밀어붙이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더 이상 따르지 않으려 하거나 회의감을 느낍니다. 친구들끼리 의견 충돌, 서로에 대한 실망과 오해가 발생합니다.
6) 어른들과의 대립
학교와 경찰은 학생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제지하려 합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체벌하거나 행위를 막으려 하지만, 야스다 일행은 계속 도발합니다. 어른들은 학생들의 행동을 ‘철없는 일탈’로 치부하며 단속하려 합니다.
7) 축제의 실행과 결과
결국 야스다와 친구들은 계획대로 축제를 실행합니다. 공연, 영화, 연극, 퍼포먼스 등 모든 프로그램을 실행하지만, 완벽하게 진행되진 않습니다. 일부 관객은 열광하고, 일부는 냉소하며, 어른들은 황당해하고 분노합니다. 기대했던 ‘혁명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학생들은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움을 만끽합니다. 축제 준비와 학교 점거 등 여러 사건 속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은 각자 내적 성장과 혼란을 겪습니다.
8) 여운과 마무리
축제가 끝나고 야스다는 현실로 돌아옵니다. 마키와의 관계도 뚜렷한 결실 없이 흐지부지 끝납니다. 학교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야스다는 자신이 경험한 자유의 순간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마지막에는 어른이 되기 전, 한 번뿐인 ‘불꽃 같은 순간’을 경험했다는 묘한 성취감과 동시에 씁쓸함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덧없이 사라질지라도, 그 순간은 진짜였다"라는 주제의식을 남깁니다.
4. 작품 전반의 분위기
경쾌하고 유쾌하면서도, 내면에는 허무함과 청춘의 덧없음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를 흔든 학생 운동과 세계적 혁명 분위기를 고등학생 버전으로 축소하여 그린 느낌입니다. 철없는 소동 같지만, 한편으로는 ‘자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학생들의 계획은 완전한 성공도, 완전한 실패도 아닙니다. 야스다는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 불꽃 같은 자유를 만끽하며,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길로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멋진 시대였지만 결국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씁쓸하면서도 열정적인 여운을 남깁니다.
5. 이 소설의 특이점은? ‘정치가 아닌 사춘기적 저항’
많은 사람들이 『69』를 청춘소설이라 부르지만,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오히려 '정치와 무관한 저항'의 미학을 느꼈습니다. 보통 1969년 하면 떠오르는 건, 베트남전 반전운동, 히피, 체 게바라, 68혁명의 여진 같은 ‘이념’입니다. 하지만 무라카미 류는 그것을 '지방 고등학생의 사춘기적 욕망'과 접목합니다. 겐과 친구들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웅대한 이념보다는, '답답한 선생들과 학교에 반항하고, 멋진 애들처럼 살아보자'는 감정에서 출발해요. 이게 너무 진짜 같고 그래서 웃기면서도 찡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도 그랬잖아요. 교복을 찢어 입고, 시끄러운 밴드 음악을 듣고, 미술실 벽에 낙서하면서. “이대로 살 수는 없다”는 그 기분, 정확히 말로 설명 못해도 느꼈던 무언가.
소설 『69』의 주요 테마는 세대 반항, 서구 문화와 자유, 연애와 성장, 순간의 열정 등입니다. 이 소설은 당시 일본 학생운동, 전 세계의 68혁명 등 청년 반란 분위기를 일본 고등학생 버전으로 보여줌으로써 학교와 기성세대에 대한 도발적 저항을 암시합니다. 밥 딜런, 롤링 스톤즈 같은 서구 록 음악과 영화에 대한 열광은 문화적 자유를 통해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며, 소설에서 그리는 연애 감정 역시 한 인격체의 삶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겪는 성장, 정체성 탐색, 예술적 욕망과 연결됩니다. 청춘 특유의 ‘지금 아니면 안 돼’라는 급박함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순간적인 열정을 찬란하게 꽃 피웁니다.
6. 『69 』 소설과 영화 비교
2004년에 제작된 이상일 감독의 동명의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표현 방식과 초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 영화 《69 sixty nine》(2004) 개요
- 감독: 이상일
- 주연: 츠마부키 사토시(야스다 역), 안도 유코(마키 역), 카네코 노부아키(아다마 역)
- 개봉: 2004년
- 배경: 원작과 마찬가지로 1969년 규슈의 한 시골 고등학교
- 톤: 경쾌하고 유쾌한 코미디 요소 강화
2) 소설과의 공통점
둘 다 1969년 일본 규슈 지방의 고등학교를 무대로 하며,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학생 운동, 반전, 서구 문화 열풍 등)를 공유합니다. 더불어 청춘의 열정과 연애, 성장을 주요 테마로 하는데, '하고 싶은 걸 하고야 말겠다'는 청춘 특유의 충동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핵심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주인공 야스다와 친구들이 학교를 흔들고자 하는 반항적 시도, 마키에 대한 야스다의 감정이 중요한 축으로 사랑, 예술, 자유가 뒤섞인 복잡한 청춘 심리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3) 소설과의 차이점
하지만 소설이 더 내밀하고 철학적이라면, 영화는 유쾌함과 코미디에 초점을 맞춘 측면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야스다의 내면 독백과 사상, 철학적 고민이 강조됩니다. 단순한 소동극이 아니라 청춘의 모순과 허무, 성장통을 깊이 탐구하며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 대한 성찰이 많습니다. 반면 영화는 전반적으로 코믹한 분위기를 강조하며 밝고 경쾌합니다. 원작의 내면적인 철학적 고민보다, 사건과 행동 중심으로 재구성되어 친구들과의 장난, 축제 준비, 야스다의 엉뚱한 행동들이 시각적으로 유쾌하게 그려집니다.
학교 묘사 역시 소설 속에서는 학교를 기성세대 권위의 상징으로, 보다 체제 비판적이고 날카롭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면 영화 속 학교는 비록 권위에 대한 비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코믹한 반항극으로 연출되었습니다. 교사 캐릭터도 희화화됩니다. 끝으로 소설과 영화 장르 고유의 특성일 수 있지만, 소설은 내면 독백과 상황 설명이 많아 느리고 성찰적인 흐름을 유지한다면, 영화는 빠른 편집, 경쾌한 록 음악, 만화 같은 연출 기법으로 가벼운 감각을 전달합니다.
결론적으로 소설 『69 』는 자전적 요소가 강하고, 철학적인 청춘문학입니다. 시대상과 학생운동, 반전 의식, 문화 혁명적 기류가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등장인물의 심리와 사상을 깊이 파고들어 청춘의 아름다움과 씁쓸함, 허무함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영화 《69 sixty nine》의 경우 시각적으로 경쾌하고 빠른 호흡으로 진행됩니다. 코미디적 연출과 유머러스한 에피소드 위주로 대중성과 오락성 강화, 원작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1969년 일본 청춘문화에 대한 향수와 낭만을 강조합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주변의 작은 69들을 문득 떠올려보게 됩니다. 씁쓸하지만 부당함과 무력감이 저변에 깔려 있는 우리네 삶 속에서 가끔은 작은 불꽃이 튀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지요. 그건 아마도 켄이 말한 “가만히 있으면 끝장”이라는 감정의 현대 버전이었겠죠.『69』는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그런 감각, 바보 같지만 뜨거운 반란의 감각을 다시 깨워줍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종종 과격하고 선정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69』는 오히려 정제된 자전적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동시에 너무 웃기고, 너무 현실적이에요. 특히 현대 사회처럼 위계와 권위가 견고한 시대에 이 소설은 웃음을 빌려 '용기'를 말하는 드문 텍스트입니다. 당신의 안에도 1969년이 있지 않나요? 어딘가에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지금은 아니야"라고 외면해온 것들. 이 소설은 그런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지하게 장난쳐보자. 어른들보다 우리가 더 멋질 수 있다고, 보여주자고.”
책장을 덮고,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며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만의 69’를 만들 수 있을까? 학생 땐 너무 순진해서 용기 냈고, 지금은 너무 복잡해서 조용해진 나. 그러니까, 가끔은 『69』 같은 소설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의 불온한 웃음과 반항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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