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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엄과 미디어, 예술은 어떻게 매체를 통해 말하는가

by 문화과학자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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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왜 ‘미디엄과 미디어’를 말해야 하는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작품은 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을까?” 캔버스 위에 유화를 바른 것도, 벽에 투사된 영상 설치도,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속 스크롤형 아트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죠.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즉 매체, 더 구체적으로 미디엄(medium)과 미디어(media)의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둘을 혼동하거나 같은 말로 쓰지만, 실제로는 예술사와 현대미디어 이론 모두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예술 속 미디엄과 미디어의 개념, 그 철학적 배경, 그리고 21세기 대중문화 속에서의 변화 양상을 흥미롭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2. 미디엄(Medium): 예술의 물질적 몸체

흔히 미디엄은 물감과 비디오처럼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나 물질을 말합니다. 그리고 미디어는 미디움 여러 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미디움은 예술 작품이 존재하고 작동하기 위한 구체적인 ‘형태’와 ‘도구’입니다. 쉽게 말해 유화, 수채화, 판화, 사진, 조각, 영상 같은 ‘형태적 매체’가 여기에 해당하죠. 철학자들이 말하는 ‘미디엄’은 단순히 도구나 재료를 넘어서 작품이 자기 자신을 구현하고 관객과 관계를 맺는 방식 전체를 포함합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순수 미디엄

20세기 중반,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예술은 자기 미디엄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컨대 회화라면 회화 고유의 평면성, 색, 선, 붓질 등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입장은 ‘모더니즘’ 미술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좋은 회화란 회화적인 것을 자각하고, 그 고유성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그린버그

 

그린버그는 미디엄을 예술의 정체성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미디엄이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예술의 존재 조건이자 언어였던 셈이죠.

 

3. 미디어(Media): 예술의 전달 체계

일반적으로 미디어(media)는 예술이 전달되는 구조적 환경에 주목합니다. 미디엄이 물질적이라면, 미디어는 기술적이고 사회적입니다. 인쇄물, 방송, 인터넷, SNS 등 정보와 감각이 유통되는 통로 전체를 의미하죠. 예컨대 같은 회화도 갤러리 벽에 걸릴 때, 인스타그램에 게시될 때, TV 광고에 삽입될 때 모두 다른 방식으로 경험됩니다. 여기엔 매체의 물성뿐 아니라 전달 방식, 맥락, 기술, 수용자의 방식이 얽혀있습니다.

마셜 맥루언: “미디어가 메시지다”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medium is the message.” —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다.

 

그는 미디어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지각, 사회, 사고방식을 바꾸는 힘이라고 봤습니다. 예술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보다, 어떤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느냐가 더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죠. 

 

4. 미디엄과 미디어의 만남: 예술은 어떻게 진화했나?

미디움과 미디어는 엄격히 나뉘기보다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현대 예술은 이 둘을 결합하고 전복하며 새로운 표현 방식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1) 사진과 영화의 등장

19세기 후반 사진과 20세기 초 영화의 등장은 회화의 지위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회화는 더 이상 ‘사실적 재현’의 최전선이 아니었고, 대신 주관성, 추상성, 개념을 탐구하게 되었죠. 이 시기는 미디엄의 자각과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2) 디지털 시대: 미디어 아트의 출현

컴퓨터, 인터넷,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예술의 전통적 미디엄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낳았습니다. 디지털 예술, 인터랙티브 아트, 가상현실 아트 등은 미디어가 미디엄이 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이때 예술은 ‘표현된 것’이라기보다 관계 맺기와 체험의 장으로 변화합니다.

 

5. 예술가들은 어떻게 매체를 다루는가?

 

1) 미디움 중심 작가

  • 잭슨 폴록: 붓 대신 드리핑 기법으로 회화의 물성을 극대화
  • 루치오 폰타나: 캔버스를 찢음으로써 회화의 한계를 넘어서려 함

2) 미디어 중심 작가

  • 백남준: 텔레비전을 재료로 삼은 설치미술
  • 올라퍼 엘리아슨: 관객이 직접 체험하는 빛과 환경 설치

이 작가들은 단지 새로운 기법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디엄/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 예술가입니다.

 

6. SNS 시대의 예술: 누구나 미디어 아티스트?

 

오늘날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같은 플랫폼 미디어는 예술의 생산-유통-소비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 작품은 이미지 이상으로 ‘콘텐츠’가 되었고,
  • 전시장은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왔으며,
  • 관람자는 동시에 생산자(프로슈머)가 되었습니다.

이제 ‘좋아요’를 받는 형식으로 작품의 가치가 매겨지기도 하고, 밈(meme)이나 AI 생성 이미지는 ‘작가’ 없는 예술로도 간주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예술과 미디어 사이의 경계가 재편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7. 당면 과제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 “예술은 미디엄에 충실해야 하는가, 아니면 미디어를 활용해야 하는가?”
  • “작품은 감동을 전하기 위한 도구인가, 소통의 매체인가?”
  • “AI가 만든 작품도 예술인가?”

그 어느 쪽도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예술은 언제나 자신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통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를 결정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술가든 관람자든, 우리는 미디엄과 미디어를 더 깊이 이해하고, 변화하는 감각의 지형 속에서 비판적 감상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술, 기술, 인간 사이에서

 

‘미디엄과 미디어’라는 렌즈는 우리에게 단지 예술의 한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방식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 미디엄은 인간이 감각을 확장하는 도구이고,
  • 미디어는 인간이 공동체 속에서 의미를 나누는 장치입니다.

예술은 그 사이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 당신은 무엇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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